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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3년, 30년》(4)
2024년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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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미는 결코 평범한 처녀가 아니였다. 학선의 《예언》대로 학급의 초급단체비서가 된 그는 며칠도 안되여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던것이다. 해안포병출신이여서 그런지 일단 설미의 과녁이 되면 누구든 직탄세례를 면치 못하였다.
  초급단체비서로서 처음 학급앞에 나섰을 때 설미는 대학생의 풍모와 자격에 대하여 특별히 모박아 강조하였다.
  처녀에게 끌려다니는감이 들었으나 설미의 원칙적인 립장에 모두가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던 어느날 국어강독과목시간이였다.
  이날은 《얼룩곰의 겨울나이차비》라는 우화읽기련습을 하게 되였다.
  과목담임교원은 마흔고개를 퍽 넘긴 중년녀성의 세련된 외모속에 10대소년의 동심을 생생히 보존하고있는 신비스러운 선생님이였다.
  방울 굴러가는듯한 목소리로 동요를 읊는다거나 깔깔 웃음을 섞어가며 동화의 한 대목을 읽어넘길 때에는 아득히 멀어져간 유년시절이 선생님의 온몸과 넋속에 다시 찾아드는듯싶었다.
  이날도 어렵지 않게 동화세계의 아기자기한 장면들을 재현해보인 선생님은 눈깜빡할새에 교원의 엄격한 표정으로 돌아와 학적부를 펼쳐들었다.
  《그럼 준비된 동무들부터 나와서 해보겠습니다.》
  제일먼저 설미가 일어섰다. 역시 제대군인다운 기백이 넘쳐나는 처녀였다.
  목소리도 괜찮았다. 선생님만큼은 못해도 대목마다 소리색갈을 달리해가며 제법 그럴듯하게 형상해내는것이였다.
  《잘했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되겠어요. 또 다른 동무!》
  짜락짜락 박수속에 다른 녀동무가 교탁을 향해 나간다. 예닐곱명쯤 지나서 내옆에 앉은 학선이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약간 허둥거리는 시선을 겨우 교탁우에 붙들어놓고 몸가짐도 퍽 어색한 발표였으나 랑독솜씨만은 별로 나무랄데없다.
  선생님도 만족스러운듯 제자리에 되돌아오는 학선의 등에 따뜻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시간은 퍼그나 흘렀다. 이제는 나와 한철명 두사람만이 남았다. 마침내 한철명이 우화에 나오는 그 곰같은 몸집을 힘겹게 일으켜 교탁앞에 나가섰다.
  《가을이 오니 얼룩곰에게는…》하고 턱없이 웅근 목소리가 울려나오는 바람에 누군가 키드득 입을 싸쥐였다. 띠염띠염 흘러나오는 이야기속에 우화의 얼룩곰은 자루를 메고 산굽이를 돌아서는데 땀방울은 다름아닌 한철명의 널직한 이마에 돋아나는것이다.
  《곰아저씨, 곰아저씨, 도토리가 똘랑똘랑 떨어져요.》
  마침내 강의실에는 와- 하고 폭소가 터졌다. 나도 웃음을 참아내지 못했다.
  저것이 어떻게 쪼르르 달려나온 다람쥐의 다급한 목소리란 말인가. 그러거나말거나 한철명은 계속 읽고 얼룩곰은 계속 걸어간다.
  이번에는 도토리가 졸졸 새나온다고 걱정하는 산토끼, 줄줄 쏟아진다고 충고하는 너구리…
  한철명 본인으로서는 산토끼나 너구리의 가늘고 깜찍한 목소리를 뽑아보려고 가엾으리만큼 무진 애를 쓰는데 오히려 그것이 더 웃음을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