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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3년, 30년》(12)
2024년 창작

  다음날부터 나는 결심을 달리했다. 설미에게 미술을 가르치는것같은 어리석은 놀음을 집어치우고 남은 방학기간을 보다 유용하게 보낼 생각이였다.
  솔직히 말한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소학교교원을 해보려던 나의 생각은 언제부터인가 우화에 나오는 얼룩곰의 터진 자루처럼 똘랑똘랑 새여나가기 시작했던것이다. 이제는 졸졸 아니, 줄줄 빠져달아난다.
  나 아니면 교단에 설 사람이 없겠는가. 무슨 일을 하든 더 보람있고 큰일을 할것이며 후날 뒤돌아볼 때 사람들의 기억속에 뚜렷한 자욱을 남기는 그런 생을 살것이다.…
  철명에게서, 그다음은 설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처음 몇번은 몸이 불편하다고 핑게대다가 아예 손전화기도 꺼버렸다.
  며칠후 설미가 한철명을 앞세우고 집에까지 찾아왔다. 나는 태연하게 그를 맞이하였다. 어머니가 집에 안계시는것이 참으로 다행이였다.
  《준민동지, 어쩌면 그럴수 있습니까? 제대군인인 준민동지가 먼저 물러서면 다른 동무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시작부터 만만치 않게 접어든다. 이미 예견했던지라 나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나서 침착하게 물었다.
  《한가지만 묻겠소. 글쎄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우등생학급을 만든다치기요. 그것이 무엇에 필요하오? 소문이나 내자구?》
  그 물음이 자못 이상했던지 설미는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다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야… 우린 모두 교원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역시 이상한 대답이다. 그러니 최우등생이 아니면 교원을 못한다는것인가?
  내 속생각을 짐작한듯 설미는 말을 이었다.
  《물론 최우등생이 아니라도 교단에 설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교원때문에 조국의 미래에 그늘이 질수도 있다는걸 준민동진 몰라서 묻습니까?》
  마치도 초급단체총회 보고서의 한구절을 인용하는것같다. 물론 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추억속에 얼굴이나 겨우 남아있는 소학교교원이 그 미래에 드리워놓을 그늘이란 과연 어떤것이고 얼마나 될것인가.
  《허, 이거 점점 더 심각해지누만. 혹시 동무자신에게 소학교선생님이 던져준 어떤 그늘이라도 있는게 아니요?》
  언제부터 알고싶던것이라 나는 묻고싶지 않은것을 물었다. 설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의 거침없던 말도 뚝 끊어졌다.
  왜 선뜻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하는가? 자기 미숙성의 원인을 스승에게서 찾는것은 비렬하다.
  《동무의 그 선생님은…》
  될수록 어성을 낮추려고 애쓰며 나는 명치끝에 덩어리처럼 맺혀돌아가던것을 힘겹게 내뱉았다.
  《부족한게 너무 많았던가보군.》
  설미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였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우리가 다른 대학에서 공부했다면 그럴 필요조차 없었겠지요. 하지만 나나 철명동지처럼 누구든 또 그렇게 되지 않게…》
  설미는 말을 끝맺을수 없었다.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나가넘어졌던것이다. 그 요란한 소리에 옆방에 가있던 한철명이 손에 사과알을 든채로 뛰여 들어왔다.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눅잦히며 설미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옳소, 확실히 교훈이요. 동무같은 제자를 둔 그 선생님은 분명히 실책을 범했소. 나도 그렇게는 살지 않을테니 더 상관하지 마오.》
  설미는 나의 흥분을 리해할수가 없었을것이다. 그의 동실한 얼굴과 동그란 눈은 의혹으로 굳어져버렸다.
  방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재깍거리는 탁상시계의 초침소리만 높아졌다. 한철명의 목구멍으로 뭔가 꿀꺽 넘어가는 소리도 들렸다.
  마침내 설미가 입을 열었다.
  《래일은 나오십시오.》
  실로 검질긴 처녀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가? 참, 잊을번했구만. 동무의 기억속에 사라져가는 그 선생님을 내가 한번 그려봤는데 나의 변변치 않은 미술수업기념으로 받아주오.》
  나는 화첩갈피에 끼워두었던 종이를 꺼내여 그에게 내밀었다. 보아다오, 처녀야. 너를 위해 많은것을 바치고도 그것때문에 죄의식을 감수해야 하는 나의 어머니, 너의 옛 스승일지도 모르는 모습을…
  한철명이 설미대신 나의 손에서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가 무슨 눈짓을 했는지 설미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하지만 래일 또 오겠습니다. 배우려는 사람이 찾아다니는게 도리에도 맞지요.》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슨 처녀가 저런지 이건 내리칠수록 튀여오르는 고무공 한가지였다.
  속이 불끈한 나머지 나는 처녀의 등뒤에 대고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그만 뱉아버리고말았다.
  《난 동무같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가 누구처럼 후회하진 않겠소, 절대로!》
  문가로 다가가던 설미는 흠칫 멈춰섰다.
  그러나 끝내는 문을 열고 나갔다.
  분명 충격을 받았을것이나 그렇다고 다른 처녀들처럼 얼굴이 빨갛게 타오르거나 눈귀가 축축해진다면 그건 벌써 설미가 아니다.
  《여, 정신나갔어?》
  내 어깨를 툭 쥐여박은 한철명이 설미를 뒤쫓아갔다.
  정말이지 나도 제정신이 아닌것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