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와 조선 - 력사적사실
가리울수 없는 《문화통치》의 악랄성
   지난 세기 초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1919년 8월 헌병경찰제도에 기초한 무단통치로부터 《문화통치》로 식민지통치체계를 바꾸었습니다.
  그 동기가 바로 1919년 우리 인민이 일으킨 3.1인민봉기였습니다. 봉기는 비록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존엄을 유린하려는 외래침략자들과는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는 우리 인민의 불굴의 투지와 숭고한 기개를 만천하에 시위한 중요한 계기로 되였습니다.
  이에 겁을 먹은 일제는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는것으로써 조선에서의 식민지통치를 유지하려고 꾀하였습니다.
  《문화통치》의 중요한 징표라도 되는듯이 요란스럽게 떠든것이 바로 조선총독으로는 무관만이 될수 있다고 하였던것을 문관도 임명될수 있으며 총독은 군사통수권을 가지지 않는다는 규정이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총독으로 한번도 문관을 임명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예비역 해군대장이였던 사이또를 현역군인으로 다시 복대시키고 그에게 사복을 입혀 제3대 총독으로 조선에 파견하였습니다.


제3대, 5대총독 사이또 마꼬도

  일제는 《문화통치》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바꾸고 경찰인원수를 급격히 늘이는 한편 감옥들을 대대적으로 신설확장하였습니다.


평양형무소

  《문화통치》시기 우리 인민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책동은 더욱 악랄해졌습니다.
  일제는 겉으로는 언론과 집회, 출판에 대한 《자유》를 표방해나섰지만 조선글로 된 신문과 잡지들에 대한 엄격한 검열제도를 세워놓고 조금이라도 반일적요소를 가진 글이 실릴 경우에는 배포금지 또는 발간정지처분을 내리거나 완전히 페간시켰으며 필자와 편집자들을 마구 체포구금하였습니다.
  집회의 《자유》라는것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사람들이 집회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일제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하였으며 반드시 경찰의 감시밑에서만 진행할수 있었습니다. 한편 집회장소에서 일제경찰은 질서와 공안유지를 구실로 집회자들의 발언을 구속하였으며 그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즉석에서 잡아가두고 집회를 해산시키였습니다.


조선어학회탄압에 대한 일본도서자료

  《문화통치》의 간판밑에 일제가 실시한 식민지통치는 이렇게 우리 인민의 정치적권리는 물론 생존권과 민족의식까지 깡그리 말살한 극악무도한 탄압정치, 살인정치였습니다.